도쿠다이지 사네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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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쿠다이지 사네사다는 1141년에 태어나 1191년에 사망한 일본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귀족이자 시인이다. 그는 3세에 서작하여 순조롭게 관직을 거쳐 내대신, 우대신, 좌대신을 역임했다. 시가와 관현에 능하여 《오구라 백인일수》에 그의 시가 수록되었으며, 《센자이 와카슈》 등 칙찬집에도 작품이 실렸다. 그는 정치적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신뢰를 받았으며, 그의 가계는 후대에 이르러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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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다이지 사네사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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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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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도쿠다이지 사네사다 (徳大寺 実定) |
다른 이름 | 고도쿠다이지 사다이진 (後徳大寺左大臣) |
출생 | 1139년 |
사망 | 1192년 2월 1일 |
국적 | 일본 |
직업 | 귀족, 정치인 |
관직 및 작위 | |
관위 | 정2위, 좌대신 |
주군 | 고노에 천황, 고시라카와 천황, 니조 천황, 로쿠조 천황, 다카쿠라 천황, 안토쿠 천황, 고토바 천황 |
가문 | |
씨족 | 도쿠다이지 가문 |
부모 | 아버지: 도쿠다이지 기미요시, 어머니: 후지와라 고시 (후지와라 도시타다의 딸) |
형제자매 | 후지와라 기시, 보몬도노, 사네사다, 후지와라 다이시, 기미자네, 후지와라 사네이에, 도쿠다이지 사네모리, 도쿠다이지 기미히라, 도쿠다이지 기미요시, 사네엔, 사네토모, 도쿠다이지 사네인, 사네카이, 후지와라 모로나가의 부인, 후지와라 미치시게의 부인, 후지와라 구니쓰나의 부인, 미나모토 스케카타의 부인 |
배우자 | 후지와라 아키나가의 딸, 후지와라 모로나가의 딸, 조사이몬인의 여방 비고 |
자녀 | |
자녀 | 도쿠다이지 기미쓰나, 도쿠다이지 기미모리, 도쿠다이지 기미쓰구, 도쿠다이지 기미히로, 기미겐, 료젠의 어머니 |
양자 | 도쿠다이지 기미카타 |
2. 생애
에이지 원년(1141년) 3세에 서작(공경보임)되었고, 코지 3년 1월 28일(1144년 3월 4일) 숙모의 남편인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의 저택에서 원복을 하였다.(『다이키』) 이후 순조롭게 승진하여 호겐 원년(1156년) 9월 좌근위권중장, 11월 9일 종삼위에 서위되어 공경 반열에 올랐다. 호겐 3년(1158년) 정삼위권중납언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고시라카와 천황의 누이 토우시 내친왕이 황후가 되자 황후궁권대부를 겸했다. 에이랴쿠 원년(1160년) 정관의 중납언으로 전임되었다.
쵸칸 2년(1164년) 권대납언으로 승진했으나, 다음 해인 에이만 원년(1165년) 사임하고 정이위에 올랐다. 고금저문집에 따르면, 이는 같은 관직에 있던 후지와라노 사네나가를 앞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12년 동안 산위에 머물렀다. 나카무라 아야는 당시 도쿠다이지 가문과 헤이케가 경쟁 관계[1]에 있었고,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사네사다와 그의 형제 사네이에를 정치적으로 배제하려 했다고 지적한다.
지쇼 원년(1177년) 3월 대납언으로 복귀했고, 12월에 좌근위대장을 겸했다. 헤이케 이야기는 사다사다가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동정을 구하기 위해 이츠쿠시마 신사에 참배했기 때문이라고 전하지만, 실제 참배는 2년 후인 지쇼 3년(1179년) 3월의 일이다.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 이츠쿠시마 참배가 유행이었고, 헤이케와의 관계와 상관없이 많은 귀족들이 참배했다. 사다사다의 동행자 중에는 지쇼 3년의 정변으로 경질된 미나모토노 스케카타도 포함되어 있었다.
쥬에이 2년(1183년) 내대신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호쥬지 전투로 정권을 탈취했을 때, 사다사다는 상중으로 공무에 종사할 수 없는 사실상의 휴직 중이었다. 마츠도노 모토후사는 요시나카와 결탁하여 자신의 아들 모로이에를 후지와라 씨 장자로 만들기 위해 사다사다로부터 일시적으로 내대신 직을 빌려 모로이에를 섭정 내대신에 앉혔다.[2] 그러나 다음 해 1월 요시나카가 패사하면서 모토후사, 모로이에 부자는 실각하고, 사다사다는 복관한다.
분지 원년(1185년) 10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고시라카와 법황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추토 선지에 한 번은 찬성했지만, 다음 달 요시츠네는 도읍을 떠났다. 그 후, 요리토모의 추천으로 의주 공경으로 지명되었다.[3][4] 분지 2년(1186년) 10월 우대신, 분지 5년(1189년) 7월 좌대신에 올라, 구조 가네자네의 측근으로서 조정과 막부 사이를 중재하는 데 힘썼다. "후토쿠다이지 좌대신"은 조부 도쿠다이지 사네요시가 "토쿠다이지 좌대신"으로 알려진 것에서 유래한다.
좌대신 취임 후 병이 잦아져 사임을 대가로 삼남 킨츠구의 참의 임명을 바랐다. 켄큐 2년(1191년) 6월 20일,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출가, 법명은 뇨엔(如円)이다. 7월 17일, 사다사다의 희망대로 킨츠구가 참의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윤 12월 16일에 훙거했다. 향년 53세. 『아즈마카가미』는 "막하(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매우 한숨을 쉬었다. 관동에 유래가 있다. 평소 존경받는 바였다"라고 적어 요리토모의 신뢰를 보여준다.[4]
2. 1. 출생과 가계
도쿠다이지 킨요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후지와라 도시타다의 딸인 후지와라 고시이다.후지와라 아키나가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도쿠다이지 킨쓰나를 낳았다. 또 다른 아내인 후지와라 모로나가의 딸[5]과의 사이에서는 아들 도쿠다이지 킨모리를 얻었다. 조사이몬인 뇨보 빈고를 아내로 맞아 셋째 아들 도쿠다이지 킨츠구를 두었는데, 킨츠구는 훗날 종1위 좌대신에 올랐다. 이 외에도 생모가 불분명한 아들 도운(닌나지 승도), 도쿠다이지 킨히로(시종), 킨겐과 딸 료젠의 어머니가 있었다. 도쿠다이지 킨모토의 아들 킨호를 양자로 삼았다.
2. 2. 초기 경력
에이지 원년(1141년) 3세의 나이로 서작(공경보임)되었다.[1] 코지 3년 1월 28일(1144년 3월 4일) 숙모의 남편인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의 저택에서 원복을 치렀다(『다이키』).[1] 이후 호겐 원년(1156년) 9월 좌근위권중장으로 임명되기까지 순조롭게 승진했으며, 같은 해 11월 9일 종삼위에 서위되어 공경의 반열에 올랐다.[1] 호겐 3년(1158년)에는 정삼위권중납언에 임명되었다.[1] 같은 해 고시라카와 천황의 누이 토우시 내친왕이 황후가 되면서 황후궁권대부로 임명되었다.[1]2. 3. 정치적 성장과 좌절
호겐 원년(1156년) 9월, 도쿠다이지 사네사다는 좌근위권중장으로 임명되었고, 11월 9일에는 종삼위에 올라 공경의 반열에 들었다.[1] 호겐 3년(1158년) 정삼위 권중납언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고시라카와 천황의 누이 토우시 내친왕이 황후가 되자 황후궁권대부가 되었다. 에이랴쿠 원년(1160년) 정관의 중납언으로 전임되었다. 쵸칸 2년(1164년) 권대납언으로 승진했으나, 다음 해인 에이만 원년(1165년) 사임하고 정이위에 올랐다. 고금저문집에 따르면, 이는 같은 관직에 있던 후지와라노 사네나가를 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그러나 그 후 12년 동안 산위에 머물렀다.[1] 나카무라 아야는 당시 도쿠다이지 가문과 헤이케가 경쟁 관계에 있었고,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사네사다와 그의 형제 사네이에를 정치적으로 배제하려 했다고 지적한다.[1]
2. 4. 헤이케와의 관계 및 재기
도쿠다이지 사네사다는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동정을 얻기 위해 이쓰쿠시마 신사에 참배했다는 平家의 기록과는 달리, 지쇼 원년(1177년) 3월에 대납언으로 복귀하고 12월에 좌근위대장을 겸임한 것은 실제 참배 시점(지쇼 3년, 1179년 3월)보다 2년 전의 일이다.[1] 당시 귀족 사회에서는 이쓰쿠시마 신사 참배가 유행이었고, 平家와의 관계와 상관없이 많은 귀족들이 참배했다. 사네사다의 동행자 중에는 지쇼 3년의 정변으로 경질된 미나모토노 스케카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平家의 내용에 대한 신빙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2. 5.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와의 관계
1183년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호쥬지 전투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을 때, 도쿠다이지 사네사다는 상중이라 공식적인 업무를 볼 수 없는 사실상 휴직 상태였다.[2] 마츠도노 모토후사는 이 기회를 틈타 요시나카와 결탁하여 자신의 아들 모로이에를 후지와라 씨 장자로 만들고자 했다. 모토후사는 사네사다의 내대신 직을 일시적으로 빌리는 형태로 모로이에를 섭정 내대신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2]이듬해인 1184년 1월, 요시나카가 패배하면서 모토후사와 모로이에는 실각했고, 사네사다는 내대신 직에 복귀했다.[2]
2. 6.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의 협력
분지 원년(1185년) 10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와 고시라카와 법황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추토하라는 선지(명령)를 내리는 데 한 번은 찬성했으나, 다음 달 요시쓰네가 도읍을 떠났다. 그 후, 요리토모의 추천으로 의주(조정 회의에 참여하는) 공경(고위 관료)으로 지명되었다.[3][4]분지 2년(1186년) 10월 우대신(조정의 최고위 관직 중 하나), 분지 5년(1189년) 7월 좌대신(우대신보다 높은 관직)에 올라, 구조 가네자네의 측근으로서 조정과 막부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후토쿠다이지 좌대신"이라는 별칭은 할아버지 도쿠다이지 사네요시가 "토쿠다이지 좌대신"으로 알려진 것에서 유래한다.
당시 고려는 무신정권 시대로, 대외적으로 강경한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네사다가 조정과 막부 사이를 중재한 것은 고려와 일본 간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 내에서 막부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고려와의 관계에서도 변화가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사네사다의 활동은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이 고려를 비롯한 주변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 나갈지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 7. 만년과 죽음
하지만 좌대신 취임 후에는 병이 잦아졌고, 사임을 하는 대신 후계자인 삼남 긴쓰구를 참의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겐큐 2년(1191년) 6월 20일, 병으로 인해 관직을 사임하고 출가하였으며, 법명은 뇨엔(如円)이다. 같은 해 7월 17일, 사다사다의 희망대로 긴쓰구가 참의로 임명되었다.[4] 윤 12월 16일에 훙거하였다. 향년 53세. 그의 죽음에 대해 『아즈마카가미』는 "막하(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매우 한숨을 쉬었다. 관동에 유래가 있다. 평소 존경받는 바였다"라고 적혀 있어 요리토모의 신뢰를 엿볼 수 있다.[4]3. 시인으로서의 활동
도쿠다이지 사네사다는 시가와 관현에 능한 문화인이었다. 그의 시 중 하나는 《백인일수》에 수록되어 있다.
3. 1. 작품 활동
시가와 관현에 뛰어나 교양 있는 문화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시 중 하나는 《백인일수》에 수록되어 있다.또한 문재가 있어 지쇼·주에이 연간(1177년 - 1185년)의 행차에 관한 기록의 초록인 『정괴초』(별명 『괴림기』)를 남겼다. 그 외에도 『장함보초』 10권의 저술이 존재했던 듯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저문집』 129에 "풍월의 재능이 뛰어나다"라고 기록된 것처럼 한시도 잘 지었지만, 특히 와카의 재능이 뛰어났다. 가오 2년(1170년) 10월 9일의 『스미요시 신사 가합』, 지쇼 2년의 『우다이진 후지와라 가네자네 집 백수』 등, 많은 가합·가회에 참가했다. 사네사다의 가집을 『임하집』이라 하며, 『센자이 와카슈』, 『신고킨 와카슈』 이하의 칙찬집에도 73수가 수록되어 있다.
사네사다의 와카 활동은 헤이케와의 정치적 경쟁에서 패배하여 산위에 머물게 되고, 침륜을 면치 못했던 에이만-지쇼 연간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만년에는 작가 활동에 그다지 정력적이지 않아, 정진을 게을리했다는 것을 후에 슌에에게 비판받았다.
3. 2. 백인일수
도쿠다이지 사네사다는 백인일수에 수록된 시로 유명하다. 그의 시는 다음과 같다.: 두견새 소리 반가운 마음에 뒤돌아보니 네가 있을 곳에는 아련한 새벽달만이
ほととぎす鳴きつる方をながむればただ有明の月ぞ残れる일본어
이 시는 센자이 와카집 여름 161에 수록된 것으로, 뻐꾸기(두견새) 울음소리를 듣고 그쪽을 바라보니 새벽달만 남아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덧없는 인생의 무상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국의 시조나 향가가 자연과의 교감, 임을 향한 그리움 등을 노래한 것과 비교할 때, 일본의 와카는 자연 현상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특징을 보인다. 사네사다의 시는 이러한 와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시 중 하나이다. 특히, 새벽달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덧없음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드러내는 점이 돋보인다.
참조
[1]
문서
実定の権大納言辞任は六条天皇即位の直後にあたるが、六条天皇の生母を出した伊岐氏は徳大寺家の家司であったことから徳大寺家は外戚に准じる立場にあり、自己の縁戚である憲仁親王(後の高倉天皇)の擁立を意図する清盛にとっての政治的障害になっていたとする。また、高倉天皇の大嘗会に奉仕する女御代に実定の娘が選ばれながら突如清盛の娘に差し替えられた事(『兵範記』仁安3年7月30日・8月28日条など)、実定が清盛の側近である[[藤原邦綱]]の娘(母親は実定の妹)と縁組しようとした際に清盛が阻止に動いた事(『玉葉』治承元年11月11日条・『愚昧記』同年11月15日条)など、実定の政治的復権につながりうる動きには掣肘が加えられている。
[2]
서적
玉葉
1184-11-23
[3]
문서
頼朝追討宣旨発給の経緯について頼朝は、妹婿の[[一条能保]]から「都人の伝言」として報告を受けているが、その情報は後白河院の諮問に対する経宗、兼実、実定、経房の奏上内容や院近臣の動向に触れるなど極めて詳細なものだった(『吾妻鏡』11月10日条)。能保が鎌倉にいながら朝廷中枢に関わる情報を得られた理由について、佐伯智広は能保の母が徳大寺公能の娘であることから、実定が表向きは追討宣旨発給に賛同しながら、密かに甥の能保と通じていたのではないかと推測している。議奏指名後に実定が越前国、弟の実家が美作国を知行国として獲得しているのは、情報提供に対する報奨とも考えられる(佐伯智広「一条能保と鎌倉初期公武関係」『古代文化』564、2006年)。
[4]
문서
実定と頼朝の繋がりは一条能保との関係に加えて、統子内親王(上西門院)が皇后宮であった時に皇后宮権大夫と同権少進を務め上下関係にあったことが知られている。なお、上西門院と実定の繋がりは以後も長く続き、女院の女房であった備後局が実定の後継者である公継の生母となり、その公継も上西門院の御給によって叙爵されている。
[5]
문서
徳大寺公守の母を藤原顕長の娘とも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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